●공격수-손흥민-이동국
유럽파와 국내파를 대표하는 두 스타 공격수, 2010년대 손흥민과 이동국보다 더 많은 골을 터뜨리는 한국인 공격수는 없다.
월드 클래스 손흥민은 독일 함부르크에서 프로에 데뷔한 뒤 레버쿠젠과 토트넘을 거쳐 차범근 전 감독의 한국인 유럽파 최다 골(126골)을 30년 만에 뛰어넘는 업적을 올렸다.
또한 2019년 발롱도르에서는 22위로 역대 아시아 선수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하며 명실상부한 차범근-박지성의 계보를 잇는 ‘2010년대 한국 축구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동국은 K리그의 살아있는 역사다.
K리그 역대 최다 골 기록을 224골로 늘렸고 어시스트도 77개를 기록해 역대 첫 300공격 포인트를 돌파했다.
불혹을 넘긴 2019년에도 33경기에서 9골 2도움으로 건재한 활약을 펼쳤다.
2010년 대만 리그 우승 6회(통산 7회),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기록은 모두 이동국과 함께였다.
상대적으로 아쉬운 대표팀과 월드컵에서의 불운 때문에 과소평가되는 부분도 있지만 한국 축구 역사상 13번째로 센추리클럽(105경기 33골) 가입과 전대륙 득점자 타이틀에서 보듯 이동국이 한국 축구의 역대 공격수 계보를 잇는 선수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드필더 – 박지성, 기성용, 구자철, 이근호
박지성의 개인적 전성기는 엄밀히 말해 2000년대에 가깝지만 주장으로 이뤄낸 남아공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과 사상 첫 3회 연속 본선 득점은 2010년대를 말할 수 없는 한국 축구의 최고 업적이다.
맨유 시절 언터처블 히어로 역할도 훌륭했지만 대표팀에서 박지성은 언터처블 그 자체였다.
2011년 박지성이 대표팀에서 은퇴한 뒤 구자철-기성용-손흥민 등이 빈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아직 그만한 리더십과 위상을 보여준 주장은 나오지 않고 있다.
우리 시대의 아이콘인 손흥민이 개인 기록과 스타 성애에서 더 돋보인다면 박지성은 자신보다 팀을 더 강하게 만드는 리더십과 대표팀에서의 카리스마와 큰 경기에서의 활약으로 기록 이상의 가치를 발휘하는 선수였다.
‘한국 축구가 박지성을 더욱 건강하게 관리해 주었다’ 한국 축구는 2014년과 2018년에도 16강 진출을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2010년대 대표팀 중반에 있었던 기성용과 구자철은 한국 축구 역사상 딥라잉 플레이메이커와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는 드물었고 유럽 무대(독일 영국)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 이들의 존재가치는 특별했다.
런던 올림픽 동메달 신화와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중심에는 항상 이들이 있었다.
특히 기성용은 커리어 중반까지는 개인적으로 트러블이 많았지만 한국 축구 역사상 다시는 나설 수 없는 창의적 미드필더이자 중앙 에이스로서 10년간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대표팀을 지켜준 든든한 기둥이었다.
이근호는 늘 박주영 이청용 같은 유럽파에 가려 저평가됐지만 K리그나 아시아무대에서 뛰는 선수도 세계무대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모범 사례다.
2선부터 최전방까지 어떤 역할도 해내는 전술 이해력, 뛰어난 스피드와 왕성한 활동량, 여기에 연계 플레이와 오프 더 볼 움직임까지 이근호는 모든 감독의 선택지를 넓혀주는 선수였다.
2012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 2014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은 이근호의 가치를 가장 잘 보여준 대회였다.
전술적으로 활용하기 어렵다는 손흥민 박주영 김신욱 등도 이근호와 파트너가 됐을 때 예외 없이 최상의 활약을 펼쳤다.
월드컵 본선에 오른 것은 한 번(2014년)뿐이지만 이근호가 없었다면 2010년과 2018년에도 한국 축구의 월드컵 본선행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수비수-이영표, 김영권, 곽태휘
이영표는 박지성과 대표팀 클럽팀 활동 경력과 은퇴 시기까지 비슷하다.
역시 2011년을 끝으로 대표팀을 떠난 이영표가 2010년대 최고의 수비수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동안 그와 견줄 만한 측면 수비수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진수-박주호-윤석영-홍철 등 나름대로 후보는 많았지만 누구도 이영표의 아성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이영표 이후 한국 축구는 더 이상 유럽 무대에서 뛰는 정상급 수비수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이영표는 박지성보다 네 살이나 어린 나이에 유럽에서 뛰는 데 상대적으로 약한 체력인데도 30대 중반의 나이에 태극마크를 달고 대표팀에 큰 실수나 슬럼프에 빠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을 정도로 기복이 없는 자기관리로 후배 선수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오른쪽 풀백은 차두리의 자리다.
박지성-이영표와 함께 2002년 4강, 2010년 16강 신화를 함께 했던 차두리는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전향해 성공을 거둔 독특한 경우이기도 하다.
유럽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는 피지컬과 폭발적인 스피드는 이영표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한국 축구에 나오기 어려운 타입의 풀백이다.
유럽 무대에서는 저니맨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K리그로 돌아온 뒤 FA컵 우승과 아시안컵 준우승으로 클럽에서도 유종의 미를 거뒀다.
차라리 빨리 수비로 전향했더라면 세계적인 풀백으로 성장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영표와 차두리 이후 좌우 풀백은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골칫거리로 남아 있다.
센터백은 여러 선수가 대표팀을 거쳤지만 꾸준함에선 역시 김영권과 곽태휘가 가장 돋보인다.
김영권은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과 2014-18 월드컵 주전 멤버로 계속 한국 축구의 주축 수비수로 활약했다.
클럽 무대에서도 아시아의 신흥 강호 광저우 항대의 핵심 수비수로 중국과 아시아 무대를 평정했다.
가끔 어이없는 실책과 실언으로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활약하면서 든든한 베테랑으로 거듭났다.
곽태휘는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이동국 못지않은 월드컵 불운이 아쉬운 선수다.
유일하게 월드컵에 출전한 2014년에는 한 번도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2010년에는 부상, 2018년에는 노쇠화로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클럽축구의 울산 시절과 중동 무대, 월드컵 지역예선과 아시안컵 등 본선을 제외한 각종 무대에서 10여 년 동안 한국 축구를 빛낸 대표적인 센터백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2015년 아시안컵 준우승은 곽태휘의 대표팀 경력 중 최고의 경력이자 마지막으로 빛난 시간이었다.
골키퍼 조현우
1990년대 중후반이 김병지, 2000년대가 이운재 시대였다면 2010년대는 골키퍼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다.
2010년대 초반까지 정성룡이 독보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면 중반 이후에는 김진현 김승규 조형우 등이 잇따라 등장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모두가 뛰어난 선수라 누구 하나 손을 들기는 힘들지만 역시 최대 무대인 월드컵 본선에서 주전으로 역대급 활약을 펼친 조현우의 임팩트가 강렬했다.
소속팀 대구의 전력은 약한 편이어서 저평가됐지만 조현우의 뛰어난 선방 능력은 생애 첫 메이저 대회였던 러시아 월드컵에서 빛났다.
독일전 무실점 승리를 비롯해 3경기 3실점에 그친 신태영의 수비를 사실상 하드캐리했다.
이 가운데 2골은 페널티킥으로 사실상 조현우의 실점으로 인한 실점은 없었다.
2002년 월드컵 이운재의 아성에 가장 가까워졌고 어쩌면 더 뛰어난 월드클래스 활약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게 조현우의 2018년이었다.
●2010년대 최고의 감독은? 허정무 축구대표팀 인터뷰
2010년대 K리그는 전북 시대였고 그 중심에는 봉동 이장 최강희 감독이 있었다.
최 감독은 K리그의 별볼일 없는 지방구단에 불과했던 전북을 오늘날 국내 최강을 넘어 아실루를 호령하는 클럽으로 성장시켰다.
유일한 흑역사이자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바람을 피워야 했던 국가대표팀의 임시 사령탑 기간을 제외하면 최 감독은 자타가 공인하는 K리그 최고의 명장이었다.
최 감독은 전북을 떠나 중국으로 진출한 뒤 첫 시즌 3팀을 거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최 감독은 K리그에는 없지만 올 시즌 전북이 이룬 3연패는 여전히 최 감독 유산에 빚이 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첫 원정 16강에 오른 허정무 감독이 있었다.
실제로 허 감독은 국내 지도자들을 저평가하는 분위기 속에서 처음부터 비난 여론에 시달려야 했고 심지어 16강에 오른 뒤에도 성과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허 감독 이후 대표팀을 잇는 국내외 지도자들의 난맥상과 대표팀의 부진 속에 허정무 시대가 히딩크 감독 이후 한국 축구의 또 다른 황금기였다는 점이 재평가되고 있다.
박지성-이영표를 비롯해 기성용-이청용-이근호-박주영-구자철-곽태휘 등으로 이어지는 20002010년대 한국 축구의 중추를 처음 발굴하고 중용한 것은 허정무호의 안목과 결단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기타 언급해야 할 선수들
이청용은 2010년대 기성용과 함께 ‘쌍용’으로 불리며 한국 축구에 혜성처럼 등장한 테크니션이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과 잉글랜드 볼턴 시절 초창기의 활약은 그야말로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하고 2011년 치명적인 다리 골절 부상과 이후 소속팀의 2부 리그 강등-주전 경쟁 등에서 심각하게 꼬여버린 경력은 축구팬들에게 오래도록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어느새 노장이 된 이청용은 현재 독일로 무대를 옮겨 여전히 유럽에서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박주영도 2010년대 한국 축구의 한 획을 그을 뻔했다.
프랑스 리그 AS 모나코 시절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도 촉망받는 공격수로 인정받았지만 아스널 이적 이후 3년 가까운 강제 공백기와 거듭된 부진, 병역 의혹,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무임승차 등 숱한 갈등 속에 지금은 국가대표팀의 흑역사로 전락했다.
노장이 된 지금은 K리그로 돌아가 이동국만큼은 아니지만 FC 서울의 연고지 스타로 어느 정도 재기에 성공했다.
수원의 심장부이자 왼발의 마법사 염기훈, 한국의 크라우치 김신욱, 월드컵 2회 본선에서 주전으로 활약한 이용, 유럽의 풀백 김진수, 박주호, 골키퍼 김승규, 정성룡 등도 2010년대 결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타들이다.
또 2010년대 후반에 등장한 김민재·이강인·황희찬·권창훈·황의조 등은 아직 전성기라기보다는 다가올 2020년대의 활약이 기대되는 선수들이다.
2020년대에는 한국축구가 더 빛나는 재능과 훌륭한 역사가 탄생하기를 축구팬들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