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영화 평론가 손을 잡아 전선을

나를 밀어내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법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전에 다른 사람에게 해고당한 경험이 있다는 얘기다.
김정은의 사정이다.
(2021.01.28)

문#허남웅 영화평론가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전에 다른 사람에게 해고당한 경험이 있다는 얘기다.
김정은(유다인)의 사연이다.
실제로 해고된 것은 아니다.
7년간 근무한 회사로부터 하청업체에 일방적인 파견 명령을 받았다.
7년간 사무실에서 관리직으로 일해 온 김정은이 현장에 나와 송전탑을 수리·보수하는 파견업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다.
해고 통보인 셈이다.

회사의 권고사직에 맞서 김정은은 해고 ‘당할’ 생각이 없다.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 일도 잘하고 우수 사원 표창까지 받은 인재인데 잘못한 게 있으면 받아들일 텐데 그런 일 없이 파견 1년을 마치면 다시 회사로 복귀시켜 주겠다는 제안이 김정은은 굴욕적이다.
이에 굴복해 퇴사한다면 생존 절벽으로 내몰릴 뿐 아니라 김정은의 존재를 지탱해온 정체성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김정은은 노동자다.
노동자인 이전의 인간이다.
회사 복귀는 단순히 월급을 받고자 조직에 충성하는 한 직원의 지위 회복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 특히 노동권을 지키는 것이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를 연출한 이태겸 감독은 “사무직 중년 여성이 지방 현장직으로 부당 파견됐는데 그곳에서 엄청난 치욕을 겪었음에도 결국 버텼다는 기사를 보고 영감을 얻어 이 영화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김정은이 원청, 그러니까 회사 관리직으로 근무할 당시 파견업체와는 갑을 관계로 지위 고하가 갈려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무수한 생존 위협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버티는 같은 노동자 입장에서 환영까지는 아니더라도 하청업체 직원들의 적개심을 받을 줄은 몰랐다.
서류만 쓰고 알아보는 줄 알고 현장 업무는 문외한이라는 이유로 여성이 일하는 곳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원을 초과해 전직 직원이 그만둬야 하는 생존 경쟁자라는 이유로 김정은은 여기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권고사직에 성차별 제안을 빌미로 한 불법파견 명령에 생존의 고삐가 죄이는 가운데 김정은은 각자의 삶의 밧줄에서 동료를 떨어뜨리고 혼자 살아남는 대신 추락하지 않도록 손을 내밀며 존엄의 선을 잇는 연대의식을 배운다.
김정은 파견으로 위상이 위태로워지는 사람은 고과 점수가 가장 좋지 않은 막내(오정세)다.
저항이 클 텐데 막내는 이렇다 할 미동도 하지 않는다.
송전탑 수리·보수가 끝나면 저녁 파트타임으로 편의점에서 일하고 새벽에는 취객 대신 운전대를 잡고 대리운전을 한다.

두 딸을 키우는 막내는 자신보다 가족을 위해 일한다.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송종은 김정은에게도 가고 있으며 송전탑 수리·보수에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알려달라는 김정은의 요청에 묵묵히 응하며 연대의 가치를 실천한다.
김정은 입장에서 막내가 감사하면서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은 개인의 생존만을 생각하고 남의, 경쟁자의, 동료 사정은 살펴볼 겨를이 없었던 것에 대한 반성과 자각이다.
밑을 보지 말고 위만 보고 올라가세요. 계단을 오르듯 단 한 걸음씩 송전탑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김정은에게 막내가 버팀목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다.

송전탑은 그 높이와 크기 때문에 위압적이고 차가운 재질 때문에 풍경에 이질적이고 고압 전류가 흐르며 노동자에게는 생명을 담보해야 하는 극단적인 작업 환경이다.
한편 전선을 연결하여 빛을 전달하여 도시는 물론 멀리 떨어진 섬에서도 생활의 편리성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송전탑이 품은 빛과 그림자의 원리처럼 지금 이 사회는 그 두 가지를 선으로 연결해 링을 만들고 약자를 시험에 넣도록 유도한다.
그중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도 하고 99% 노동을 연료로 1%만이 따뜻함을 누리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기도 한다.

파견 명령을 받고 하청업체에 내려갈 때까지 김정은에게 이사회는 나와 그들에게 나눠 투쟁해야 하는 전선이었다.
막내의 호의에 송전탑에 올라 전선을 연결하는 법을 익히고 다시 보게 된 세상은 손을 잡으면 언젠가는 밝게 빛나는 희망의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
나를 밀어내는 세상에 스스로 해고 선언을 하지 않는 개인이 모이면 불붙는 사회가 되고, 그렇게 발열하는 빛의 규모에 따른 세상이 될 것이다.
김정은은 막내가 내민 손을 잡는 법을 익혔다.
이제 김정은이 내민 손을 잡을 차례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 전에 다른 사람에게 해고당한 경험이 있다는 얘기다.
김정은의 사정이다.
(2021.01.28) m.ch.ye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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