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림왕 – 문치주의를 표방하다.

문치주의를 표방한다.

고구려의 17대 왕인 소수림왕은 소수림왕, 해미류왕이라고도 하며 구부라는 이름입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고, 고국원왕의 장남으로 고국원왕 25년인 355년에 세자에 책봉되었고, 371년 10월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평양성 싸움에서 부상을 당해 전사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384년 11월까지 13년 1개월간 재위하였습니다.
소수림왕은 전진부터 불교를 도입하여 태학을 설립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고구려 전성기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소수림왕은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세자에 책봉되기 전부터 이미 정사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는데, 전연이 고구려를 위협하던 340년 고국원왕의 명을 받고 모용황을 예방한 것이 시초였습니다.
이후 그는 고국원왕에게 협력하여 국방과 행정 전반에 걸쳐 많은 경험을 쌓았고 외교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진의 멸망을 겪으면서 전진의 성장을 지켜 보았습니다.
또한 백제의 침략으로 아버지를 잃은 상처도 함께 남게 됩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탁월한 외교능력을 발휘하여 문치주의를 표방하였는데, 그의 문치는 곧 중앙집권화와 당시의 혼란한 국제정세 속에서 외교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에 대한 정벌전쟁을 이어갔습니다.
소수림왕이 즉위할 무렵 중원에 큰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입니다.
“이미 270년에 모용씨의 전연이 절족, 현재의 청해성 주변에 거주하던 민족)의 우두머리, 부견이 인솔하는 전진에게 몰락하고, 그 잔존 세력은 부견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부견은 남진하여 동진의 익주를 탈취하고, 서쪽은 구지와 전량, 또 북쪽은 소수족의 지방할거정권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게 됩니다.
전진은 여세를 몰아 동진을 멸망시키고 중국 통일의 야심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전진은 고구려에 대해서만 온건했어요. 그들은 동진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배후가 안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전진은 전연의 영토를 차지했지만, 한시대의 옛 요동, 현도, 유주 등의 지역에 대해서는 고구려에 양보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고구려는 전진의 의중을 재빨리 파악하고 소수림왕 즉위 초기 전연이 차지했던 유주 및 현도, 요동 등을 점령하고 하북과 산동으로 진출을 꾀했습니다.
하지만 산동과 하북에서는 백제가 세력을 확장해 북상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고국 원왕의 전사로서 백제에 원한을 품고 있던 고구려는 북진을 추진하는 백제에 보복할 움직임을 보였고, 백제도 고구려의 침입을 예상하고 항상 대비하고 있었죠.하지만 소수림왕은 쉽게 백제를 향해 칼을 빼들지 않았어요. 소림왕은 국제 정세를 잘 알고 정치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흥강국으로 성장했던 부견의 전진과 화친을 맺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고, 또 한편으로는 강남의 동진과도 깊은 관계를 맺어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외교노선은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에백제도동진과외교관계를맺어고구려의압박정책에대항하게되었습니다.

소림왕은 이처럼 고도의 외교 전략을 구사하며 대내외에 문치주의를 표방했습니다.
국방 중심의 외교노선에서 탈피하여 문화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외교형태를 구사하여 전진과 동진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중앙집권화를 도모하고 왕권 강화를 도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수림왕은 먼저 전진과 동진에서 크게 부흥했던 불교를 적극 받아들이고 종교적 일체감을 도모하는 한편, 태학을 세우고 교육제도를 체계화하였습니다.
또한 율령을 반포하여 관습법에 의존하던 기존의 통치 형태를 극복하고 법치국가의 면모를 일신하였습니다.